- 나각
나각은 관악기의 하나로 "나" 또는 "소라"라고도 한다.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는 고려 의종 때 각 종 위장이나 노부의 수레 뒤에 따르던 취라군이 이 악기를 불었다는 <고려사>의 기록이다. 만드 는 법은 바다에서 사는 큰소라를 잡아 살을 꺼내고, 꽁무니 뾰족한 끝부분을 갈아 취구를 만들어 끼운다. 일정한 크기는 없으며 소라의 원형 그대로 쓰기도 하고, 천으로 거죽을 씌우기도 하며 속 에 붉은 칠을 하여 모양을 내어 치레하기도 한다. 이 악기는 낮은 외마디 소리이지만 웅장하고 우렁찬 지속음을 낸다.
- 나발
나발은 관악기의 하나로 우리나라에 언제 들어왔는지 그 연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태평소,북,장고,징,나각,자바라 등과 함께 대취타 연주에 쓰인 것으로 보아 그 당시 다른 악기와 함께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것으로 보인다.
- 단소
단소는 길이가 39cm 정도, 굵기가 2cm 정도 되는 세로로 내려 부는 악기(縱笛)이다. 이 악기가 어느 때부터 우리나라에서 연주되기 시작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단소의 지공(指孔)은 뒤에 하나, 앞에 네 개가 있다. 그러나 제일 아랫 구멍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단소는 이렇게 풍류방에서 다른 악기와 같이 현악영산회상을 연주하거나 가곡?가사?시조를 반주하는 중요한 악기다. 또 단소는 합주 뿐 만 아니라 생황(笙黃)이나 양금, 또는 가야금이나 거문고 같은 악기와 병주(竝奏)하기도 한다. 이런 현악기와의 연주에서 단소는 현악기와 달리 지속음을 제공해 주는 역할을 한다. 단소는 이밖에도 그 청아한 음색 때문에 독주 악기로서도 널리 애용되어 왔다. 단소는 합주에서 E 짜리를 불지만 이것은 단소로서도 상당히 높은 것이므로 독주 때는 이보다 낮은 단소를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단소는 한국 전통음악의 기본음 E (黃種)으로 부터 시작되지 않고 A (仲呂)을 기음(基音)으로 하여 음계가 구성되기 때문에 E를 기음으로 한 음악을 연주하는데 필요한 C음(南呂)은 낼 수없다. 따라서 밑에서 셋째 구멍을 반만 열어서 소리를 내기 때문에 웬만큼 익숙하지 않고는 정확한 연주를 하기가 어렵다. 대나무는 두 종류를 쓰는데 노란색의 황죽(黃竹)과 거무스름한 오죽(烏竹)이다.오죽은 보기는 좋으나 조금 약해서 쪼개지기 쉬우므로 취급이 어렵고 황죽은 단단하여 소리도 좋고 비교적 오래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즈음은 좋은 황죽을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요즈음의 단소는 대나무 외에도 금형(金型)을 떠서 PVC로 대량 생산 하기도 하는데 대나무 단소보다 더 정밀하게 만들 수 있다. PVC 단소는 색깔이나 모양도 대나무 비슷하게 할 수 있으며 잘 갈라지지 않아 간수하기가 쉽다. 소리도 대나무 단소와 크게 다르지 않고 값도 싸서 일반 보급에 효과적이다.
- 당적
당적은 당악계 음악에 사용하던 횡적이다.
- 대금
"신라 신문왕 때, 동해에 작은 산이 있어 그 모양이 자라 머리와 같고 그 산위에 대나무가 있었는데, 낮이면 대나무가 둘이 되고 밤이면 하나가 되매 임금이 이를 베어오게 하여 젓대를 만들게 하고 이름을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하였다"
- 생활
이 종류의 악기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있어 왔다.
- 소금
가로 부는 관악기의 하나로 우리나라 고유의 가로 부는 적 중 가장 큰 것을 대금, 중간 크기를 중금이라 하고, 제일 작은 것을 소금이라 한다. 신라시대에는 소금이 대금. 중금과 함께 삼죽으로 불렸다. 신라의 소금은 중국의 당적과 함께 고려시대를 통하여 전해왔고, 조선조 성종 24년 (1493)의 <악학궤범>에도 나타난다. <악학궤범> 에는 소금의 구조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이 없이 소금과 대금이 악기의 제도에 있어서 같다고만 하였으므로 당시의 대금과 같이 취공1, 청공1, 지공6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약
아악기의 하나로서 주 시대에 이미 이 악기가 사용되었다는 기록을 옛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대의 약은 대가 아니고 갈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이것을 갈약이라고 하였다.
- 적
단소처럼 생긴 악기에 적( )과 통소(洞簫)가 있다. 이들은 다 단소보다 내경(內經)이나 길이가 상당히 커서 길이가 54cm, 지름이 2.6cm 이상이다. 적은 {악학궤범(樂學軌範)}에 보면 문묘(文廟, 孔子廟) 제례악에 사용되는 악기로 뒤에 구멍이 하나, 앞에 5개 있다.
- 중금
중금은 대금과 아울러 신라삼죽의 하나로 널리 향악에 사용되던 횡적으로서 대금과 소금의 소금의 중간에 든다. 고려 고종때 한림제유의 소찬으로 전하는 한림별곡은 시부, 서적, 명필, 명주, 화훼, 음악, 누각, 의 팔경을 읊은 노래다. 이 노래의 제육연은 다음과 같다. 아양금 문장적 종무중금 대어향 옥기향 쌍가야ㅅ고. 금선비파 종지비금 설원장고 위 과야경 긔 엇더 ㅎ니잇고 (엽) 일지홍의 빗근 적취 일지홍의 빗근 적취 위 듣고아 드러지라 이로 보면 중금은 노래의 반주
- 지
지는 김을 넣는 부분은 단소와 같으나 소금(小 )과 같이 옆으로 부는 대로 만든 관악기의 하나이다. 좀 더 설명하면 소금의 취구(吹口) 부분에 단소의 맨 윗 부분을 잘라 붙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을 의취라고 말하는데 취는 새의 주둥이를 말하는 것으로 본래 제것이 아니라 가져다 붙인 취구(吹口)라는 뜻에서 그렇게 부른 것 같다.
- 태평소
태평소는 호적(胡笛), 새납, 날라리 라고 한다. 호적이란 호인(胡人) 즉 몽고인들의 관악기라는 뜻이고 새납은 본래 중앙 아시아 지방(Muslim)의 쑤르나(Zurna 혹은 Zorna)에서 쏘나로 또 새납으로 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날라리라는 이름은 악기 소리를 흉내낸 말이다. 태평소의 혀는 아주 작아 넓이가 5밀리, 길이가 2.5센티 정도밖에 안 되지만, 몸체는 나무로 만든 관이 점점 넓어지고 끝에는 서양의 나팔같이 벌어진 쇠붙이가 붙어 그 지름이 10센티 정도이다. 총 길이는 35센티, 그렇기 때문에 혀는 작지만 거기서 낸 소리는 관대를 지날 때 증폭되어 무척 큰 소리가 난다. 먼 동네서 농악을 할 때도 다른 소리는 안 들려도 태평소 소리는 들린다. 손가락으로 막는 구멍이나 부는 법 등은 향피리와 거의 같으나 음정이 좀 다를 뿐이다. 태평소는 고려시대 말부터 연주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 군대나 공식 행렬 및 종묘제례악의 정대업 연주, 그리고 불교의식과 민간의 풍물패에서도 연주되었다. 현재는 구군악(舊軍樂), 농악, 종묘제례악 등에서 연주된다. 구군악곡 중 대취타에 연주되는 가락이 중요무형문화재 제 46호로 지정되었고 첫 번째 보유자 최인서에게 가락을 배운 정재국으로 그 전통이 이어졌다.
- 통소
퉁소는 적과 비슷하나 십자공이 없고 현대는 적과 달리 당악(唐樂)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우리나라 음악에 맞도록 개량되어 독주악기로 연주되고 있다. 조선왕조 성종때는 지공(指孔)과 취공(吹孔) 사이에 처음에는 없던 청공(淸孔)을 하나 더 뚫어 젓대처럼 갈대 청을 붙였던 것 같으나 현재 국립국악원에 전하는 통소에는 이 청공이 없다. 민속악에 쓰이는 통소는 민속악 음정에 맞도록 조율되어 있다. 악기 앞의 구멍은 네 개로 바뀌었으나 청공을 뚫어 갈대청을 붙여 분다. 통소는 적이나 단소보다는 훨씬 커서 길이가 69.5cm 정도이다.
- 피리
피리를 한문으로는 (필율)이라고 쓴다. 피리는 태평소와 함께 서양악기의 오보에 처럼 겹혀(겹서, double reed)를 가진 악기이다. 오보에와 다른 점은 피리의 혀(舌)는 넓이가 2센티, 길이가 8센티 정도로 큰 점이다.
- 훈
훈(塤)은 훈(壎)이라고도 쓰며 팔음(八音)중 토부(土部)에 속한다. 우리나라에 전하고 있는 훈은 손에 들고 무게를 다는 손저울의 추(錘)처럼 생겼고 제일 넓은 밑바닥 지름이 7.5cm정도에 높이가 9cm 정도의 것이다. 훈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고려 예종(睿宗) 11년으로 송(送)나라의 대성아악(大晟雅樂)에 훈이 포함되어 있었다.
- 가야금
영토 확장에 여념이 없던 신라 진흥왕(AD540-576)에게 어느날 우륵이라는 사람이 찾아 왔다. 그는, 자신이 가야국 사람으로 "고" 라는 12줄짜리 현악기 연주자 임을 밝히고 가야국이 망해가므로 음악도 함께 없어질까봐 왕을 찾아 왔다고 사연을 아뢰었다. 진흥왕은 우륵에게 "고"의 연주를 청해 듣고 그 음악을 대악(大樂)으로 삼을 것을 결정했다. 이것을 지켜본 신하들은 망국의 음악을 받아들이는 건 옳지 않다고 반대했다. 그러나 왕은 "가야국이 망한 것은 가실왕이 음란했기 때문이지 음악 때문이 아니다"라고 하며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쳤다.
- 거문고
"진(晋)나라 사람이 고구려에 칠현금(七絃琴)을 가져왔으나 그 악기를 탈 줄 아는 사람이 없어 나라 전체에 방문(榜文)을 붙이고 칠현금 연주자를 찾았으나 없으므로 당시의 재상이던 왕산악(王山岳)이 그 본 모양을 그대로 두고 다시 다른 악기를 만들어 일백여곡을 작곡하여 연주하매 검은 학(鶴)이 날라와 춤을 추었으므로 현학금(玄鶴琴)이라 했는데 후에 현금(玄琴)이라고 하였다" 이상은 <삼국사기> 권 32에 있는 거문고에 관한 기록이다. 그러나 이는 믿기 어렵다.
- 금
칠현의 금이라는 뜻에서 칠현금이라 하고 휘를 박은 것을 휘금이라 한다. 금과 슬은 중국 고대 악기중의 하나다. 순 때에는 이미 오현의 금이 있었고, 주나라 문왕과 무왕이 각각 문현과 무현을 한 줄씩 더 하여 칠현의 금이 되었다고 한다. 한국의 삼국사기에 진나라 사람이 칠현금을 고구려에 보냈다는 기록외에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찾아볼 수 없다.
- 당비파
비파는 원래 호중에서 말 위에서 연주하던 것으로 밖으로 내 타면 비요 안으로 디 려 타면 파라 한 까닭에 비파라 이름하였고, 풍속통에서도 그 일어난 바를 모르겠다고 한 바와 같이 이는 중국 본래의 악기가 아니며, 그 이름도 서방 말을 한자로 옮긴 것이라는 것이 공통된 학설이다. 우리 나라에 당비파에 대한 오랜 문헌은 고구려 식화지 문종 삼십년조에 당비파사가 일인 있었다는 기록이라 하겠으나 신문왕 2년에 완성되었다는 감은사유지에서 발굴된 탑형기단상과 효공왕 8년(772) 문경 봉암사의 지증대사 죽조탑신 등에 당비파(곡경)가 보인다.
- 대공후 / 소공후
하프의 제3종에 속한다. 수서에 의하면 백제악에는 공후가 쓰였다. 백제에서 전해 받은 일본에서는 이것을 백제금이라 일컬었다. 지금도 일본 내량 정창원에는 그 당시의 공후가 두 개 보존되고 있는데, 23현이다. 굽은 공명통이 있고, 그 아래는 곧으며, 그 중간에 횡가가 있어 이 공명통과 횡가 사이에 23현 또는 13현을 얹는다. 하주를 허리에 꽂고 두 손으로 탄다.
- 대쟁
보통 쟁은 십삼현으로 되었는데, 대쟁은 십오현으로 되어 있다. 고려 예종 구년 유월에 들어 온 송의 신악 가운데에는 쟁 사면이 포함되어 있고, 예종 십일년 유월에 들어 온 송의 대성아악에는 쟁은 없고 금과 슬이 있다.
- 수공후
공후는 하프(Harp)의 총칭으로서 대체로 3종으로구분할 수 있다. 즉, 수공후와 와공후 그리고 대공후와 소공후로 나누어진다. 수공후는 제1종에 속하며 고대 埃及, 유태, 희랍 등지에서 유행하던 것이 그 후 페르시아, 인도에 전하고, 여기서 동서로 전파되어 東流한 것은 중국에 들어와 공후라 불리워지고, 유럽으로 들어 간 것은 여러 가지로 변천하여 오늘의 서양 하프를 보게 된 것이라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언제부터 어떤 경로로 어떠한 것이 들어왔는가에 대한 확실한 문헌이 없다. 다만, 수의 구부지중 고구려악에는 서량, 구자, 소륵악 과 같이 수공후를 썼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현재 국립국악원에 보존되어 있는 21현의 수공후는 와공후, 대공후, 소공후, 운나 등과 함께 1937년 故 함화진 씨(제5세 아악사장)가 북경에서 사 들인 것이다. 현재는 타는법도 모르고 쓰이지 않는다.
- 슬
중국 고대의 악기중의 하나로 줄은 이십오현이다. 은 시대의 슬이 발굴되었으니 이 악기의 발생이 얼마나 오래된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예종 십일년 유월 송에서 보내온 대성아악의 등가에 슬 이면, 헌가에 사십이면이 들어 왔다. 그 후 아악의 등가에 편성되어 지금에 이른다.
- 아쟁
아쟁은 울림통이 가야금이나 거문고 보다 좀 크고 높다. 현은 원래 일곱 줄이었으나 요즈음은 음역을 늘이기 위해 아홉 줄을 사용하고있다. 개나리 나무의 껍질을 벗겨만든 활대에 송진을 묻혀 줄을 문질러 소리 내는데 가야금보다 사뭇 굵은 줄이므로 좀 거친 저음이 나온다. 개나리 나무는 속이 비어 있어 현을 공명시키는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줄이 굵으므로 안족도 가야금이나 거문고 같이 악기를 무릎에 올려놓고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받침대를 놓고 아쟁의 머리 부분을 비스듬하게 걸친 채로 바로 앉아. 활대로 앞뒤로 줄을 그어 연주한다.
- 양금
양금은 구라철사금이라 한다. 조선 영조대에 청나라에서 들어와 주로 민간의 정악연주에 사용되었다. 악기분류법에 따르면 사부 또는 현명악기에 속한다. 사다리꼴의 판명위에 두 개의 긴 괘를 세로로 질러 고정시키고 괘 위에 14개의 금속줄을 가로로 얹은 다음, 대나무를 깎아 만든 가는 채로 줄을 때려서 맑은 금속성의 충격음을 얻는다.
- 와공후
하프의 제2종에 속한다. 목이 굽은 모양이 봉황의 형상이라하여 봉수공후라고도 한다.
- 월금
월금의 딴 이름은 완함이고, 완함은 진비파 또는 진한자라고도 불렀다. 완함에는 사현인데 오현도 있다. 즉 통구의 삼실종, 악학궤범, 일본 내량 정창종의 것은 모두 사현인데 대하여 무용총의 것은 오현으로서 조아는 3개를 아래로 하고 2개를 위로 한 것이다. 완함은 진의 죽림칠현도에 완함(자는 중용)이란 사람이 이와같은 악기를 타고 있어 그것을 완함이라 한 것이다.
- 해금
해금은 커다란 대통 -옛날에는 단단한 나무를 썼다고 함에- 마디가 많은 대나무를 세우고 두 줄을 늘어 뜨린 것인데 두 줄 사이에 말총으로 된 활을 넣어 양쪽 줄을 다 문질러 소리낸다. 해금은 송진을 칠해 마찰을 강하게 만든 활대로 줄을 문질러 연주를 한다. 이때 내는 소리가 깽깽 한다고 해서 깽깽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어느 틈에 이 말이 천한 악기라는 뜻을 내포한 말이 되고 말았다.
- 향비파
신라 통일 이후에 속하며 삼현삼죽에 든다. 삼현은 거문고, 가야고, 비파이고, 삼죽은 대금, 중금, 소금이다. 삼국사기에 "향비파는 당나라 제도와 대동소이하며 신라에서 비롯하였으나 누가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음곡에는 세 조가 았으니 궁조, 칠현조, 봉황조에 이백십이곡이 있다." 라고 있으나, 향비파가 신라에서 비롯했다는 말은 믿기 어렵다. 향비파는 사현에 곡경인 당비파와는 달리 오현에 직경인 점인 그 특징이다. 오현은 향비파의 이명동물이다.
- 갈고
갈고는 장고와 그 크기나 모양에 있어서 거의 같다. 다만 양면의 가죽이 얇고 그 크기가 같으며, 두 손에 채를 들고 치고, 음절을 조절하는 축수가 양쪽에 있다는 것이 장고와 다르다. 두 손에 채를 들고 치기 때문에 양장고라고도 한다. 갈고는 고려사에도 비치지 않았고, 악학궤범에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영조 이후의 진찬의궤에 이 악기가 더러 보이나, 지금은 국립국악원에 그 악기만 보존되어 있을 뿐,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
- 건고
전정 헌가에 쓰던 큰 북으로 가죽의 지금이 삼척 오촌, 통의 길이가 사척 구촌 오분이나 된다. 십자형으로 호랑이 모양을 한 발을 만들고 그 호랑이 위에 기등을 세우고, 그 기둥이 북통 중간을 버티어 준다. 그리고 큰 북 위에는 다시 붉은 칠한 제 기둥을 세우고, 방개를 이층으로 세우고, 이 두 방개에는 각각 홍색과 녹색의 비단 휘장이 둘러 있고, 아래 층 방개의 네 모퉁이에는 용간이 각각 하나씩 꽂혀 있고, 용간 입에는 오색사류소를 물려 내러뜨리고, 위층의 작은 방게 위에는 연화를 마련하고, 그 위에 날개를 펴고 나르는 모양을 한 백로가 꽂혀 있다.
- 교방고
고려사 악지와 악학궤범에 당악기로 소개 되어 있다. 대고와 같이 반룡이 북 통 둘레에 그려져 있고, 진고와 같이 네 발로 된 틀 위에 놓되 북 가죽이 위로 가도록 틀에 건다. 치는 법은 악절에 따라 장고의 북편 소리에 맞추어 동시에 친다. 이와 같이 교방고는 당악에 사용하였고, 행악에서는 북 틀 횡목에 긴 장대 둘을 끼고, 그것을 네 사람이 메고, 걸어 가면서 쳤다. 그러나, 향악에 속하는 무고 춤에도 이 교방고를 약간 작게 만들어 사용하였다. 무고 춤은 고려 때는 북하나를 놓고 두사람이 추었으나,이조 성종 때의 무고는 팔고무, 사고무 등으로 발전 하였다. 즉, 두사람이 출 때는 북하나, 네 사람이 출 때와 여덟 사람이 출 때는 그 춤 주는 사람 수에 따라 북도 넷 혹은 여덟 개를 사용하였다.
- 꽹과리
꽹과리는 일명 소금, 꽹매기라고도 한다. 놋쇠로 만든 둥근 모양의 악기로 지름이 20cm 내외이다. 징보다 크기만 작을 뿐 같은 모양이다. 그 용도에 따라 명칭이 다른데 궁중의 제향에 쓰이는 것은 소금이라 하고, 농악이나 무악 등에 사용되는 것은 꽹과리라고 부른다. <악학궤범>에 의하면 소금은 둑제와 종묘제향에 사용되었다. 제향에 쓰이는 소금은 붉은색을 칠한 자루에 매달려 있는데, 자루 윗부분에는 채색한 용머리가 달려 있으며, 연주할 때는 자루를 잡고 나무망치로 친다. 농악에 쓰이는 꽹과리는 징과 같이 홍사 끈으로 손잡이를 만들고 나무를 깎아 만든 꽹과리채로 친다. 이때 약간 비껴쳐야만 쇠의 파열을 막을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 꽹과리 끈을 잡은 손의 손가락으로 꽹과리의 뒷면을 눌렀다 떼었다 하면서 다양한 음향을 낸다.
- 노고/노도
노고는 긴 북 두개를 서로 엇갈리게 놓고 위에서 아래로 기둥을 관통시켜 나무틀에 고정시킨 것이다. 북면은 지름이 40cm정도이고 북통의 길이는 95cm인데, 북통의 가운데가 조금 더 부푼 것은 진고와 똑같다. 나무 틀은 편종틀과 비슷하나 밑의 기둥을 방대가 아니라 목사자(木獅子)를 十자로 교차시켜 네마리의 사자로 고정시킨 점이 재미있다. 그러므로 전체 북의 높이가 1백 97cm가 된다. 북면과 북통의 칠은 진고와 같다. 쓰임새는 절고나 진고와 같게 음악이 진행되는 중간과 시작 및 끝에 친다. 노도나 노고는 문묘 제례악 때만 아니라 선농(先農:농사의 시조),선잠(누에 기르기의 시조) 등 사람의 귀신에게 제사할 때 사용되는 것이나
- 뇌고/뇌도
뇌도는 작은 북 세 개를 긴 자루에 꿰어 놓은 것이다. 뇌고는 진고를 따라 같이 치지만 뇌도는 음악이 시작하기 전에 세 번을 흔든다.즉, 북이 달린 긴 자루를 수평으로 뉘어서 흔들면 북통 양옆에 느러뜨린 가죽 끈이 고면을 두들겨 소리를 낸다. 이에 계속해서 축을 세 번 치고 진고를 한번 치기를 세 번 반복한 다음 합주가 시작된다. 뇌고와 뇌도는 이조 세종 때에 제작 되었고, 원단제가 폐지된 뒤로는 이 악기도 쓰이지 않게 되었다.
- 목탁
목탁은 한 종류일 뿐이지만, 크기에 따라 소리가 다양하다. 목탁은 절에서 예불에 쓰이는 사물인 목탁, 종, 운반, 목어 악기 중의 하나로서, 크기에 따라 음정, 음색이 각기 다르다. 몸통이 클수록 무겁고 낮은 소리가 나며, 몸통이 작을수록 맑고 높은 소리가 난다. 목탁을 음악 연주에 사용할 때에는 음악에 알맞은 것을 한두개 정도 선택하여 쓰는데, 근래에 와서는 음정이 다른 목탁을 여러개 틀에 묶어서 사용하기도 한다.
- 방울
여기서 소개하고자 하는 방울은 경기 지방의 무속음악에 쓰이는 것이며, 조그마한 방울 여러개를 하나로 묶어서 만든 것이다. 경기 무속음악에 쓰이는 방울은 무당이 손에 들고 흔들어서 소리를 내는데, 여러개의 작은 방울이 서로 부딪쳐 나는 소리가 독특하여, 창작음악 연주에 자주 쓰이고 있다. 근래에 와서는 여러 종류의 방울들이 특히 창작무용 등에서 쓰이고 있는 데, 이 방울들은 음악 연주에 크게 활용되지는 않는다.
- 방향
방향(方響)은 길이 60mm, 넓이 15mm, 두께 6mm 정도의 철편을 8개씩 두 단으로 배열해 만든 악기이다. 철편의 크기는 비숫하나 편종?편경과 같이 두께로 음정을 조절할 수있게 했다. 두께가 굵을수록 음정이 높아지는데, 철편과 철편 사이의 음의 차이는 반음이다. 그러므로 방향은 16개의 반음으로 되어 있는 셈이다. 하단(下段)은 오른쪽에서왼쪽으로, 상단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차례로 음이 높아지도록 배열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임진란(壬辰亂)전과 뒤가 그 배열이 좀 다르게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철편을 매다는 틀은 편종틀과 비숫하나 전체적으로 좀 작은 편이다.
- 박
박은 두께 35cm, 가로 7cm, 세로 1cm의 박달나무 여섯 조각으로 되어 있다. 윗쪽에 구멍을 뚫고 가죽 끈으로 매었는데 나무와 나무 사이에 엽전을 대어 나무끼리 서로 닿지 않도록 했다. 이것은 구멍이 닳는 것을 방지하기도 하지만 나무와 나무 사이를 뜨게 해서 부채살 모양으로 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장치로 생각된다. 여섯 조각을 폈다가 한꺼번에 서로 부딧게 하면 "딱" 하는 소리가 나는데 이것으로 음악을 지휘하는 것이다. 이 박을 들고 지휘하는 사람을 집박자(執拍者)라고 한다. 집박자는 홍주의(紅周衣)라는 붉은 궁중 악사복
- 부
부(缶) 꼭 지름이 32cm, 높이가 23cm정도되는 질화로 모양의 타악기이다. 24cm 정도 높이의 조그만 받침대 위에 올려놓고 대나무 채로 친다. 채는 반 정도가 아홉 가닥으로 갈라져 있으며 연주자는 이 채로 부의 가장자리를 친다. 그러나 부의 연주에 무슨 음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리듬이 중요한 것도 아니다. 고려 때 송나라에서 들어온 대성아악(大晟雅樂)에는 부가 들어 있지 않았지만 조선조 세종 때에는 문묘제례악의 헌가(軒架) 편성에 부가 들어 있다. 이 때에는 10명의 연주원이 각각 부 하나씩을 연주하였다고 한다. 세종때 박연의 상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 북
북은 악기 중의 가장 원시적인 악기에 속한다. 처음에는 북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악기였으나 다른 악기들이 발달되고 성악이 생기면서 북은 연주보다는 반주의 역할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여러 나라의 전통 음악에는 북 만의 연주가 중요한 음악 양식으로 남아 있다. 가까운 일본의 여러 지방 민속 음악엔 으레 북 치는 전통이 남아 있다. 우리 나라에도 북 춤이나 농악에서의 장구 및 북은 그 자체 만으로도 대단히 훌륭한 공연 예술인 것이다. 북은 옛날엔 통나무를 잘라 안을 파서 사용했으나 지금은
- 삭고
삭고는 시작을 성하게 하는 북으로 전정 헌가에 사용 한다 하였다. 조회와 연향 때 대궐 뜰에서 진설하되, 진고는 가운데 있고, 삭고는 서쪽에, 응고는 동쪽에 두며 음악이 시작될 때 사용된다. 엎드린 네 호랑이 등 위에 틀을 태우고 그 틀에 북을 건다. 양쪽 가죽 지름은 일척 사촌 사분, 통의 길이는 2척 육촌 삼분으로 응고보다 약간 크다. 틀 위 중앙에는 해의 모양을 그리고 흰색을 칠한 점이 응고와 다르다.
- 소고
소고는 딴 이름으로 매구북이라고도 한다. 매굿 즉 지금의 농악에 쓰이는 작은 북으로 손잡이가 없는 것도 있고, 있는 것도 있다. 선소리꾼들 사이에서도 이 소고가 사용되고, 근자에 와서는 민속무에 이 악기를 들고 추기도 한다. 또 그가죽은 판산타령의 가사에 나타난 것과 같이 개 가죽을 쓴 것으로 기억한다. 농악에서는 대개 매장단 그 첫 박에 한 번씩 치며 춤추기도 하고, 원점만 쳐 나가기도 한다.
- 어
나무를 깍아 만든 엎드린 호랑이의 모습을 한 악기는 주변에서 거의 볼 수 없는 특이한 악기다. 호랑이의 등에는 톱을 나무로 만들어 등줄기를 따라 꼬리 부분까지 길게 박아 놓았는데 그 톱니가 27개이다. 어는 생김새 뿐만 아니라 그 연주하는 법도 아주 진기하다. 둥근 대나무 끝을 세 가닥씩 셋으로 쪼갠 채로 호랑이의 머리를 세 번 치고는 나무톱을 꼬리 쪽으로 한번 훑어 내린다. 이러기를 세 번 함으로써 음악의 끝을 장식한다.
- 영고/영도
영고는 여덟개의 북을 모아서 틀에 매단 것이다. 즉 팔면의 북을 가진 악기이다. 북통은 노란 칠을 한다. 영고, 영도가 팔면인 것은 지신의 제사인 율신악이 같은 곡을 여덟 번 반복하는 것과 일치한다. 영고와 영도의 치는 법은 뇌고, 뇌도와 같다. 이조가 멸망하고, 사직제가 없어짐에 따라 이 악기도 소용없게 되었고, 국립국악원에 보존되어 오던 악기는 육이오 동란 때 없어지고, 지금의 것은 최근에 다시 만든 것이다.
- 용고
북 통 양편에 고리를 박고, 그 고리에 끈을 달고 어깨에다 메고, 두 손에 쥔 채로 위에서 내려친다. 능행도에 보면 이 북은 태평소, 나발, 징, 자바라, 소라와 함께 대취타에 편성되어 있다. 이 용고는 악학궤범 권8에 소개된 정대업에 쓰이는 대고와 소고에 가깝다.
- 자바라
자바라는 일명 바라, 발, 제금이라고도 한다. 바라는 그 크기에 따라 자바라,요발,동발,향발,등이 있으며 또한 그 용도가 다르다. 바라는 냄비 뚜껑같이 생긴 두개의 얇고 둥근 놋쇠판으로 만들며, 놋쇠판 중앙의 불룩하게 솟은 부분에 구멍을 뚫고 끈을 꿰어 그것을 양손에 하나씩 잡고 서로 부딪쳐서 소리를 낸다. <선화봉사고려도경>에 요발이 보이며, <악학궤범>에는 동발이 나오지만 "바라" 또는 "자바라"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그뒤 순조 때의 진찬의
- 응고
응고는 마침을 조화시키는 북으로 전정 헌가에 사용한다 하였다. 그러나 음악이 시작하려면 먼저 삭고를 한 번 친 다음 응고를 한 번 치고 고축 삼성이 있은 후 합주를 시작하지만 끝날 때는 응고를 치지 않는다. 건고과 삭고과 응고는 한 짝으로 헌가에 편성된다. 응고는 삭고와 그 제도가 거의 같으며 삭공의 틀위에 해의 모양을 그리고 흰 칠을 하는데 대하여 달 모양을 그리고 붉을 칠한 것이 특징이며, 북이 삭고보다 조금 작다. 고려 예종 11년에 들어 온 송의 대취타악 헌가악기 가운데 응고가 끼어 있었고, 이조 세종 때에 건고와 함께 제작되었다. 지금 국립국악원에 전하는 응고는 삭고와 함께 육이오 동란 이후에 다시 만든 것이다.
- 장고
장고는 허리 부분이 가늘다 하여 일명 "세요고"라 부르기도 한다. [악학궤범] 에는 [문헌통고] 를 인용하여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갈고, 장고, 요고는 한나라와 위나라에서 사용되었다. 요고의 통은 큰 것은 질그릇으로, 작은 것은 나무로 만든다. 머리는 모두 넓고 허리는 가늘다. 송나라 소사의 이른바 세요고가 이것이다. 오른쪽은 채로 치고 왼쪽은 손으로 친다. 후세에는 이것을 장구라고 하였다."우리나라에는 고려시대에 송나라로부터 수입되어 조정의 당악에 쓰이고, 그 뒤 오늘날까지 속악뿐만 아니라 민속악에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장구는 오른손에 대쪽으로 만든 가는 채를 가지고 그 채편을 치며,
- 좌고
무고를 옆으로 틀에 걸어 놓은 것 같다. 좌고는 고려사나 악학궤범에 보이지 않고, 헤원의 무악도에 나온다. 헤원의 무악도에 의하면 피리 둘, 대금 하나, 소금 하나, 장고 하나, 북 하나, 이렇게 여섯잽이 편성되는 데, 이것이 삼현육각의 편성법이다. 이와 같이 좌고는 춤의 반주에 쓰이기도 하고, 주로 합악과 관악합주에 사용되고 홍악합주에는 쓰이지 않는다. 그 치는 법이 장고이 합장단과 북편, 즉 장고가 북편을 칠 때 따라 친다.
- 징
징은 우리나라 악기 중 가장 많은 이름을 갖고 있다. 그것은 크기에 따라 그 이름이 달리 되어있고 또한 지방에 따라 달리 불리기 때문이다. 징이라는 이름 외에 단순히 금(金) 또는 금징(金鉦)이라고 하였다. {악학궤범(樂學軌範)}에는 징을 대금(大金), 꽹과리를 소금(小金)이라 하여 그림과 함께 곁들여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지방에 따라서는 대야처럼 생겼다고 해서 민대야 또는 옥대야라고도하며 무당이 쓰는 징은 광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징은 쇠와 함께 농악에서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 축
축은 음악을 시작하는 데 사용되는 악기이다. 네모진 나무 상자에 윗 판에는 구멍을 뚫고 그 구멍에 나무 방망이를 세워 상자 밑 바닥을 내려 친다. 윗 면적보다 밑 면적이 적어 기중선은 사선(斜線)이 된다. 나무 상자의 사면에는 산수화(山水畵)를 그리고 윗면에는 구름을 그린다. 현재 국립국악원에 있는 것은 단단하게 하기 위하여 철로 얽어 붙였다. 방망이도 지금은 그냥 길쭉한 것을 사용하지만 {악학궤범}에는 방망이 밑에 수평으로 또 하나의 나무를 대도록 되어 있는데, 지금과는 좀 다르게 쳤다. 즉 지금은 구멍을 통해 밑바닥을 그냥 세 번씩, 세 번을 내리 치지만 당시에는 처음 한 번은 그냥 내려 치면서 그 다음 두 번은 수평으로 된 막대기의 왼쪽 오른쪽을 각각 한 번씩 치기를 세 번 했다는 것이다 {악학궤범}에는 "음악을 시작할 때는 여러 악기보다 축(祝)이 먼저 시작하고 그치게 하지는 못하니 형(兄)의 도리가 있다. 이 때문에 축이 궁현(宮懸)의 동쪽에 있어 봄의 만물이 시작하는 것을 나타낸다"고 하여 음향오행에서 푸른색은 동쪽을 의미함을 말하고 있다. 이 악기는 현재도 종묘 제례악과 문묘(文廟:孔子廟) 제례악에 동쪽에 놓아 사용되고 있으나 옛날에는 제례(祭禮)가 아닌 궁중의 각종 연주에도 사용 되었는데 이 때는 방대(方台) 라는 네모상자 모양의 받침대를 사용치 않고 따로 네 발이 달린 상(혹은 탁자) 위에 놓고 연주했다. 지금 쓰는 축은 윗 면적이 47cm x 47cm, 아랫면적이 38cm x 38cm 에다 높이가 38cm 이다. 오늘날 제례악에서 음악이 시작할 때는 박을 한 번 쳐 시작을 알리면 축이 "딱-딱딱"진고(晋鼓)가 한 번 쿵 하기를 세 번 한다. 박을 다시 한 번 쳐서 신호를 하면 모든 악기가 음악을 시작한다.
- 특경
특경은 중국 고대의 아악기로 편경보다 큰 황경종 하나를 가자에 매달고 제례악의 등가에서 음악이 그칠 때 쓰고 있으며, 음악을 시작할 때 쓰는 특종과 한쌍으로 대를 이루고 있다. 세종때에는 등가에 한틀, 헌가에 아홉틀이 쓰였으나 성종때에는 등가에 황종특경 한틀만이 사용되었다. 지금은 문묘제례악과 종묘제례악의 등가에 한 틀만 쓰인다. 특경의 재료는 남양의 경돌을 캐어다가 만드는데, 경돌은 가로무늬가 있거나 흠이 있으면 못쓴다. 장식은 편경과 같으나, 다만 목공작이 다섯이 아니고 셋일 뿐이다. 주법은 등가의 음악이 끝나려면 먼저 휘를 높이고, 절고를 세번 치며, 어를 절고소리에 따라 세번 긋는데, 특경은 절고의 첫소리와 끝소리에 각각 한 번 치면 박을 치고 음악을 끝낸다.
- 특종
특종은 단 한개의 종으로 된 악기로 16개의 종을 가진 편종과 연원을 같이하는 중국 고대의 타악기이다. 고려 예종 11년 (1116)에 들어온 대성아악 중에는 특종이 보이지 않으나 조선조 세종 때 박연이 아악을 정비할 무렵 황종에 맞추어 만들어 궁중 아악에 사용하여 왔다. 세종때에는 등가에 한틀, 헌가에 아홉틀을 썼다. 등가의 특종은 황종의 음이라야 하고 헌가의 9틀의 특종은 각각 9선율을 가졌다. 오늘날에는 문묘 석전의 등가에서만 사용되는 데, 악작할 때 박 다음에 특종을 한 번 치고 고축삼성 다음에 또 특종을 한번 울린다. 길이 45cm 가량의 편종보다 큰 종 하나를 종 틀에 걸어 놓고 치는데, 종은 동철과 납철을 화합하여 주조한다. 종체를 다섯으로 구분하는 데, 선, 우, 고, 정, 무로 선은 쇠의 광택으로 깨끗하게 씻은 것 같기 때문이고, 우는 선과 선사이의 굽은 소매아귀 같은 것이며, 고는 우 위의 퇴로 치는 곳이며, 정은 그 아래 고와 그 위의 무의 한 중간에 있는 것이고, 무는 소리가 여기서 진동하는 것이다. 장식은 편종과 같고 목공작은 다섯이 아니고 셋이다. 특종의 음은 황종이다. 주법은 제례악을 시작할 때 박을 치고 난 다음 특종을 한번 치고, 그 다음 축을 세번, 북을 한번 치는 것을 세번 반복하고 다시 특종을 한번 치고 나서 음악이 시작된다.
- 편경
편경은 돌로 된 가락 타악기로 고려 예종 11년 (1116) 송나라로부터 등가에 정성과 중성의 편경 각 한틀, 헌가에 정성과 중성의 편경 각 아홉틀을 들여왔고, 공민왕 때와 조선조 태종 때에도 명나라에서 들여다가 궁중제례악에 사용하였다. 그 뒤 조선 세종 7년 (1425) 경기도 남양에서 경돌이 발견되어 국내에서 제작되었다. 제도는 "ㄱ"자 모양으로 만든 16개의 경돌을 음높이의 순서대로 위,아래 두 단에 8개씩 홍승으로 매어단다. "ㄱ"자 모양으로 긴쪽을 고(鼓)라하고, 짧은 쪽을 고라하는데 고(鼓)가 고 보다 반구 더 길다. 반대로 넓은것으로 좁은 것을 가리우면, 고가 고(鼓)보다 반구 더 넓다. 경의 두께에 따라 음높이를 정하는 데, 경이 두꺼우면 소리가 높고, 얇으면 그 소리가 낮다. 경의 소리가 높으면 그 돌을 갈아서 얇게
- 편종
편종은 쇠붙이로 된 가락 타악기로 고려 예종 11년 (1116)에 송나라로부터 수입되어 궁중제례악에 사용되었고, 공민왕때에도 명나라에서 보내왔으나 세종 11년 (1429) 한양에 주종소를 두고 새 종을 만들어내어 주로 아악에 사용되었다. 제도는 약 30cm미만의 길이를 가진 똑같은 크기의 종 16개가 크기에 따르지 않고 두께에 따라 고저를 다르게 하여 정성 12율과 4청성을 나무틀의 위, 아래 두단으로 된 가로목에 음높이 순에 따라 한단에 8개씩 건다.